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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정하고 호랑이와 싸웠던 조선
    정보저장 2021. 5. 20.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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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호랑이로도 불리는 아무르 호랑이

     

    호환이란,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를 의미한다.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과거 호랑이는 공포 그 자체였다. 조선 전기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가 굉장히 많았다. 사람이나 소가 물려 죽는 일들이 빈번했고, 그 횟수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을 넘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쳤다.
    -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2월 5일

     

    이때 도성(都城) 가까운 지역에 호랑이가 종횡하며 사람을 물어 죽이니,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포수를 내보내서 큰 호랑이를 잡도록 하였다.
    -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2월 2일

     

    기록에 의하면 태조부터 철종까지 500여 년간 호랑이는 937회 나타났고, 피해를 본 사람만 무려 3,989명이다. 당시 사람들은 농사를 짓다가, 혹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다치거나 죽을 수 있었다. 그 시절 호랑이는 현대의 교통사고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 1909년 12월 12일자에 실린 조선 관련 그림이다. 호랑이가 마을을 덮쳐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호식’은 조선인들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뀐다. 조선의 통치자들은 기본적으로 민본주의를 추구했다. 어진 임금은 백성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백성이 행복하려면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고 농업 생산력을 길러야 했다. 그래서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마자 대대적으로 농업을 진작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호랑이 사냥이다.

     

    농토화 가능한 지역은 대부분 호랑이와 표범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들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농업 생산력을 높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조직적으로 호랑이를 잡는 전문 사냥꾼과 군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몰아내려는 조선의 의자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수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사냥 담당 직책인 착호갑사(捉虎甲士, 범을 잡기 위해 배치하던 갑사)의 수가 2,000명으로 시작해, 성종 3년에 9.900명, 성종 5년에 14,800명으로 절정에 달한다.

     

    또한 호랑이 가죽에 비싼 값을 매겨 그 가죽을 벗겨오면 누구나 큰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농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조직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하기 시작한다.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일이 없는 기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여러 방법으로 호랑이를 사냥했다. 그뿐 아니라 각 고을마다 의무적으로 호랑이 가죽을 내도록 해 전국에서 대대적인 호랑이 토벌이 일어난다.

     

    호피 한 장은 쌀 13석 5두로 당시 최고 기술자였던 궁시장의 품삯으로 환산하면 호피는 500일의 임금에 해당한다.
    - 만기요람(萬機要覽)

     

    조선시대 한 포수가 자신이 잡은 호랑이 등에 올라 타 있는 모습. ‘산포수’로 불린 호랑이 사냥꾼들은 평시에는 호랑이를 잡았지만 유사시에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렇게 조선 전기부터 성종 때까지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벌인 끝에 한반도에서 맹수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생존을 걸고 인간과 호랑이가 벌인 전투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인 인간이 승리한 것이다. 정자에서 경치를 즐기며 술과 노래에 취하고,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뛰어놀고, 봄이 오면 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만약 그때 호랑이 사냥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뒷산에 호랑이가 돌아다니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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